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 우화에서 여우는 분쟁의 씨앗으로 등장한다. 애초에 손님을 불러놓고 혼자서만 맛있는 수프를 날름날름 먹었으니 여우는 쓴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두루미는 자기가 못 먹는 모습을 보고도 "왜 안 먹니" 맛이 없니?" 하면서 자기 수프까지 뺏어가는 여우가 얼마나 얄밉게 느껴졌을까. 자고로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일이 제일 치사한데 말이다.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장난을 치거나 먹는 음식으로 장난을 치면 예민해지기 쉽고 별것 아닌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전적으로 여우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여우는 두루미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두루미에게 식사를 제의한 것도 여우였고, 맛있는 수프를 열심히 정성스럽게 끊여낸 것도 여우였다.
어쩌면 여우는 하얀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식탁보를 펼치고 프리지어꽃을 한 아름 가지고 와 테이블을 신나게 꾸몄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말로 여우가 두루미를 골탕 먹이려고 했다면 나중에 두루미의 집으로 초대받았을 때 거절했을 것이다. 자기한테 복수할 게 뻔한데 뭐 하러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여우는 두루미의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 순진하게도 두루미가 자신을 위해 만든 요리에 들뜬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여우는 두루미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왜 여우는 수프를 납작한 접시에 담아서 두루미에게 주었을까? 어쩌면 여우는 단순히 '착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허구적 합의 효과' 때문에 말이다. 허구적 합의 효과란 자기 생각이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행동하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말한다.
허구적 합의 효과는 스탠퍼드대학의 리 로스와 그의 동료들이 행한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다시 동화로 돌아가 보자. 여우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뺨치게 테이블 세팅을 해놓고, 정성을 들여서 수프를 끓인 뒤, 마지막에는 두루미도 자신처럼 넓적한 접시를 좋아한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 놓고 두루미가 못 먹자(여우의 시각에서 보면 두루미는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우는 상심해서 '내가 이만큼이나 준비했는데 안 먹다니' 하고 삐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게"라고 말한 것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여우가 못됐다며 두루미의 복수를 용인한다. 이는 여우의 입장에서 매우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러면 여우가 두루미에게 넓적한 접시를 주게 한 허구적 합의 효과는 왜 일어날까?
바로 '자기중심성' 때문에 그렇다. 카네기 멜런 대학의 행동경제학 교수 뢰벤슈타인과 로벤이 했던 실험은 바로 이러한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피실험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산에서 조난한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이후 연구자들은 "조난한 사람에게 갈증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아니면 배고픔이 더 고통스러울까요?"라고 물었다. 이때 질문을 받는 사람은 '운동하기 위해 헬스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과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에서 나가는 사람' 이렇게 두 집단이었다. 실험 결과,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에서 나가는 사람들이 운동하러 헬스장에 들어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갈증이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 실험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이해할 때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두루미의 입장에서는 여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루미는 비록 납작한 접시를 보고 기분이 나빴을지라도, 여우의 행동이 악의 없는 실수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뒤에서 칼을 갈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 나는 부리가 길어서 납작한 접시로는 먹을 수 없어. 그래서 호리병을 좋아해. 집에 호리병 있니?" 그러며 여우는 "아차!" 하면서 창고에서 호리병을 뒤적뒤적 찾아 거기에 수프를 담아 주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두루미가 '허구적 합의 효과'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우에게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면, 두루미가 여우에게 복수하는 파국적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원만한 관계를 원한다면 '투명성 착각'을 주의하자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기중심성에 의한 착각을 하기 쉽다. 비단 여우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도 당연히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 다투면서 "누구 말이 맞는지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봐!" 라든가 "아니, 보통 다들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도 다 그런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성과 관련한 또 다른 착각으로 '투명성 착각'을 들 수 있다. 투명성 착각이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상대방이 잘 알고 있을 거라 여기는 착각을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누구나 다 아는 '떴다, 떴다, 비행기'라는 동요를 생각하면서 이에 맞춰 리듬을 타보라 하자.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이게 어떤 노래인지 다른 사람들이 맞힐 것 같나요?" 이때 무려 80%의 사람들이 "쉽게 맞힐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런데 직접 실험해 보면 리듬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잘 알아맞히지 못한다. 그래서 정답률은 30%도 채 안 된다.
"당연히 알 것으로 생각했다"라는 입장과 "그걸 어떻게 아느냐"라는 입장 모두 투명성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나친 완곡어법을 사용했으면서 내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투명성 착각에 해당한다. 술 약속이 있다는 이성 친구에게 "괜찮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라고 말해놓고 나중에 가서 "되게 재밌었나 봐? 나한테 연락 한 번 안 할 정도로?"라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사실 이렇게 말한 그 사람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다. '나는 사귀는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 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그런데 신경은 쓰오니까 다른 이성은 없는지 인증 사진도 보내고, 네가 뭘 하는지 중간에 알아서 연락해.' 정말 나를 좋아하고 신경 쓴다면 이 정도는 다 알아서 헤아려 줄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 역시 투명성 착각에 속한다. 차라리 애인의 연락이 늦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나중에 연락하겠지 여우 있는 마음을 갖든가, 그도 안 되면 솔직하게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것이 좋다. 관계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줄이려면 이런 심리 효과들을 잘 인식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도록 하자.
이 글은 책 '심리학이 이토록 재밌을 줄이야' 을 요약,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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