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을 잘하고 싶다면 첫말을 잘해야 한다
비겁한 박쥐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먼 옛날 평화로웠던 동물나라에 커다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땅에 사는 들짐승과 하늘에서 사는 날짐승이 서로 자기네 힘이 더 세다고 우긴 것이었어요. 이들의 전쟁은 끝이 날 줄 몰랐답니다. 이 와중에 박쥐는 어느 편을 들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상황을 가만히 보니, 들짐승이 전쟁에서 이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박쥐는 사자를 찾아가 자신이 쥐와 닮았다며 들짐승의 편에 들어 싸우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전쟁은 계속되었고 어느 날 날짐승이 돌멩이를 입에 물고 하늘에서 공격해 오자 이번에는 들짐승이 불리해졌어요. 불안해진 박쥐는 독수리를 찾아가 날개를 보여주며 자신도 날짐승이니 날짐승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달라면 간청했습니다. 그 후로도 박쥐는 승패가 기울어질 때마다 사자와 독수리를 찾아가며 유리한 진형에 붙었습니다. 그 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들짐승과 날짐승은 모두 싸움에 지치고 말았지요. 그래서 사자와 독수리는 이런 소모적인 싸움을 하지 말자며 서로 화해를 청했습니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박쥐는 들짐승과 날짐승 모두에게서 따돌림을 당했어요. 그 후로 박쥐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숨어 살면서 밤에만 돌아다니게 되었답니다.
흔히들 박쥐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많이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박쥐가 이솝 우화에서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했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반면 혹자는 이런 박쥐를 처세술이 뛰어나다면 두둔하기도 한다. 이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심리학도로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박쥐의 '설득 기술'이다. 박쥐는 자기 모습을 제삼자가 먼저 무작정 판단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자와 독수리가 박쥐의 모습을 판단하기 전에, 박쥐는 자신에 관한 특정 정보를 미리 일러 준다. 이러한 기법을 심리학에서는 '닻 내림 효과'라고 한다.
닻 내림 효과란
닻을 내린 배가 크게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처음 제시된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즉 모르는 걸 판단할 때, 무의식적으로 처음 주어진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박쥐는 이 닻 내림 효과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들짐승의 왕인 사자의 앞에서 박쥐는 자신이 쥐와 닮았다고 말한다. 이 정보를 들은 사자는 박쥐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대신 쥐와 닮은 점을 기준으로 박쥐를 들짐승이라 판단한다. 그런데 날짐승의 왕인 독수리의 앞에서 박쥐는 자신의 날개로 독수리를 설득한다. 이에 독수리는 박쥐가 쥐와 닮았다는 점을 간과하고 박쥐를 날짐승이라 판정한다. 이러한 닻 내림 효과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서도 바로 알 수 있다. 두 사람만 있으면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방법은 이렇다. 한 사람에게는 1x2x3x4x5x6x7x8의 값을 구하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8x7x6x5x4x3x2x1의 값을 구하게 한다. 이때 종이나 펜, 계산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수학적 천재가 아닌 이상 대략적인 직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보통 큰 숫자로 시작하는 두 번쨰 문제보다 작은 숫자로 시작하는 첫 번째 문제에서 낮은 값을 답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역시 앞에서 말했던 닻 내림 효과 때문인데, 처음 제시된 숫자 1과 8이 각각 정신적 닻으로 작용해 일종의 기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닻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 마트의 광고 기법을 들 수 있다. 마트에서는 상품 가격을 표시할 때 일부러 높은 가격을 쓴 다음 그것을 빨간 줄로 긋고 그 옆에 낮은 가격을 적어 놓는다. 그러면 소비자는 높은 가격에 닻을 내려 가격이 싸졌다고 생각하여 물건을 구매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정치인들의 인상 형성을 들 수 있다. 어떤 정치인이 복지 정책을 내세우면서 '무상 교육, 무상급식'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고 하자. 유권자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슬로건에 정신적 닻을 내리게 된다. 즉 이 정치인은 복지에 힘쓰는 사람으로 인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닻 내림 효과를 악의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병역 특례'나 '부동산 투기'처럼 안 좋은 사건은 끌고 와 반대 당 정치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때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부정적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거기에 정신적 닻을 내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닻 내림 효과는 정치인, 광고주, 협상가들이 원하는 바를 얻게 해 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박쥐는 뛰어난 협상가다. 각각의 상황에 맞게 기준점을 적절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럼 닻 내림 효과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은 앞에서 제시한 박쥐 이야기 끝에 나오는 사자와 독수리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사자는 박쥐가 들짐승이 아닌 이유를 살펴보았고, 독수리도 박쥐가 날짐승이 아닌 이유를 살펴보았다. 즉 자신이 애초에 접한 정보에서 '반대의 관점'으로 생각해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처음에 접한 정보에 의해 잘못된 결정을 하는 실수를 줄이고 싶다면 판단의 근거가 되는 정보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진 정보가 올바른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다른 관점은 없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판단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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